신앙Sharing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출1:17)

진크모 2022. 5. 25. 23:51

 

[출 1:17] 그러나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 왕의 명령을 어기고 남자 아기들을 살린지라

 

애굽왕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씨앗을 말리려 할 때 히브리 산파에게 어명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히브리 산파는 자신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는 한 나라의 왕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더욱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산파들은 왕의 명대로 하지 않았고, 자기의 백성을 지키는 선택을 했습니다. 

 

두려움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봅니다. 군대에 있을 때 이야기입니다. 저는 나방을 매우 무서워했습니다. 나방이라고 하면 질색이었습니다. 이병 때 담당구역을 청소하고 있었는데, 창틀에 나방사체가 어마어마하게 쌓여 있었습니다. 이걸 안 치우면 선임한테 한 소리 듣는 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분대장이 뒤에서 저희를 감독하고 있었고, 청소 시간도 얼마 남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제 안에 나방에 대한 두려움보다 분대장 및 선임들의 한 소리에 대한 두려움이 더 컸나봅니다. 두 두려움 사이에 주저하지 않고 저는 나방의 사체를 모아 치워버렸고 임무를 무사 완수했습니다. 

 

이 때의 일이 저에게 정말로 큰 충격이 되었습니다. 정말 나방을 무서워하는 사람이었는데, 한순간 이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으니 말입니다. 나방보다 더 큰 두려움이 생기니, 나방에 대한 두려움은 아무것도 아니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이와 같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에 따라 그 가치관이나 행동양식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분명 얘기해주고 있습니다. 

 

[잠 9:10]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성경은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얘기합니다. 경외가 무엇입니까? 공경할 경(敬), 두려워할 외(畏)자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고 했습니다. 보다 직설적으로, 로마서 3장에 죄인들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데, 18절에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롬3:18)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는 것을 고발했습니다. 성경은 분명 우리가 가장 두려워해야 할 분은 하나님이라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마치 오늘의 본문에서 나온 히브리 산파들처럼 말입니다. 

 

히브리 산파들은 자신의 생사권을 쥐고 있는 왕의 명령보다 하나님을 더 두려워했습니다. '당연히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하는 거 아니야?'라고 생각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것을 삶 속에서 실천하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계심을 믿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안 살았다고 하나님의 벌을 바로 받습니까? 안 받습니다. 하나님은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은 우리가 진정 회개할 때까지 기다리십니다. 그래서 로마서 2장의 추태가 나오는 것입니다. 믿는 자들이 하나님의 이 자비하심을 이용합니다. 자신은 어쩔 수 없었다며, 하나님은 내 죄를 용서해주실거라며 생각하고 죄를 짓습니다. 그런데 재밌는 건 다른 사람이 내 앞에 있을 땐 죄를 안 짓습니다. 내 죄가 들킬까봐 두려워합니다. 내 죄를 다른 사람에게 들키는 것을 하나님 보다 더 두려워하는, 사실은 말도 안 되게 미련한 행위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저를 포함해서 정말 많은 사람들에게 해당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게 무엇입니까?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 나는 교만과 거만과 악한 행실과 패역한 입을 미워하느니라"(잠 8:13)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고 얘기했습니다. 그리고 그 악의 내용은 이어서 나옵니다. 우리가 살면서 정말 하나님을 두려워합니까? 이 말씀으로 우리 자신을 점검해야겠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한다고 하면서 이런 죄악을 저지르는 사람은 거짓된 사람입니다. 어떤 죄적인 유혹이 와도 "하나님이 살아계시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냐!?"하고 그 유혹을 물리칠 수 있어야겠습니다. 이것을 가장 모범적으로 잘한 인물이 창세기의 요셉입니다. 그는 아무도 보는 이가 없는 곳에서 보디발 장군의 아내가 자신을 유혹했을 때, 그는 살아계신 하나님께 득죄할 수 없다며 그 유혹을 뿌리쳤습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에도 두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둘다 높은 차원인데, 둘 중의 하나는 나머지 하나보다 더 높은 차원입니다. 먼저는 하나님께 벌을 받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내가 죄를 지으면 하나님께서 진노하신다.'는 생각입니다. 마치 '천벌을 받을 수도 있다'하며 악행을 억제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이는 율법적인 차원입니다. 그리고 이보다 더 높은 차원은 바로 '내가 죄를 지으면 하나님께서 마음 아파하실거야.'라는 생각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분이 싫어하는 일이니까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차원, 사랑의 차원인 것입니다. 대개 많은 사람들이 첫번째 율법적인 차원에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사랑의 깊은 세계를 안 크리스천들은 이 복음의 차원으로 넘어올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러하길 바라고 계십니다.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입니까 아니면 다른 무엇입니까? 다른 무엇이라면 그것은 우상숭배를 하고 있는 것이고, 또 다른 말로 이는 영적 간음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가장 두려워하길 바랍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우리는 하나님의 벌을 두려워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가슴 아파하실 것을 두려워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과의 사랑 안에서 일치를 이룰 수 있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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